미국은 왜 갑자기 대마를 합법화했을까? 2018 농업법이 바꾼 헴프와 CBD의 운명
Updated: Jul 31

미국 중서부의 어느 농장.
끝없이 펼쳐진 초록빛 밭에서 농부들은 옥수수도, 밀도 아닌 낯선 식물을 수확하고 있습니다.
바로 헴프(Hemp)입니다.
지금은 미국 전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이런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에서는 헴프를 키우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왜 미국은 갑자기 수십 년 동안 금지했던 헴프를 다시 허용하게 되었을까요?
그 이야기는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미국이 가장 먼저 사랑했던 식물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습니다.
헴프는 원래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농작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7세기부터 미국에서는 헴프로 밧줄을 만들고, 선박의 돛을 만들고, 종이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목재보다 질기고 면보다 오래가는 섬유였기 때문에 군수산업에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전략 자원이었습니다.
심지어 미국 독립전쟁 당시에도 군용 로프와 군복 제작에 헴프가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 농부들에게 헴프는 지금의 옥수수나 밀처럼 너무나도 평범한 작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마약이 되었을까?
1930년대 들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대마를 기호용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미국 사회에서는 대마 전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헴프와 마리화나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두 식물 모두 Cannabis sativa라는 같은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1937년 Marijuana Tax Act가 통과되면서 대마 산업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은 1970년.
미국 정부는 Controlled Substances Act(마약류 관리법)를 제정하면서 헴프까지
마리화나와 같은 규제를 적용했습니다.
THC가 거의 없는 산업용 헴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 수천 년 동안 인류와 함께했던 산업용 작물은 하루아침에 '마약'이라는 이름 아래
사라지게 됩니다.
미국 농부들의 밭에서도 헴프는 자취를 감췄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다시 헴프를 찾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기후 변화.
플라스틱 문제.
탄소중립.
친환경 농업.
지속가능한 산업.
전 세계가 새로운 미래 산업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과학자들과 농업 전문가들은 오래전 잊혀졌던 한 작물을 다시 떠올립니다.
바로 헴프였습니다.
헴프는 놀라울 정도로 성장 속도가 빠릅니다.
심은 지 100일 정도면 수확이 가능하고, 농약 사용량도 적으며, 토양을 비교적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게다가 줄기, 씨앗, 꽃, 잎까지 거의 버릴 것이 없습니다.
환경을 생각하는 시대에 이보다 매력적인 작물은 많지 않았습니다.
운명을 바꾼 2018년 | 헴프 CBD 2018 Farmbill 농업법 대마
그리고 마침내 2018년.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법 하나가 통과됩니다.
바로 Agriculture Improvement Act of 2018, 흔히 2018 Farm Bill이라고 부르는 법입니다.
이 법은 헴프를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THC가 0.3% 이하인 대마는 더 이상 마약이 아니다."
단 한 줄의 정의가 미국 산업을 뒤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이 법이 통과되면서 헴프는 연방 차원에서 합법적인 농작물로 인정받았고, 농민들은
다시 헴프를 재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은행 대출도 받을 수 있었고, 농업 보험도 가입할 수 있었으며, 각 주 정부는
자체적인 헴프 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순간에 새로운 시장이 열린 것입니다.
사람들이 진짜 관심을 가진 것은 CBD였다
하지만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CBD(Cannabidiol)입니다.
CBD는 헴프에 들어 있는 수백 가지 천연 성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THC와 혼동하지만 CBD는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성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과학자들은 CBD가 우리 몸속 엔도카나비노이드 시스템(Endocannabinoid System)
과 상호작용하며 다양한 생리 기능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통증.
염증.
수면.
스트레스.
불안.
면역 반응.
이런 분야에서 가능성이 보고되면서 연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실제로 2018년 이후 미국에서는 수천 편의 CBD 관련 논문이 발표되었고,
대학과 연구기관에서도 관련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이곳 콜로라도 주립대에서도 연구중에 있습니다.
CBD는 만병통치약일까?
여기서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종종
"CBD가 모든 병을 고친다."
"암도 치료한다."
라는 과장된 광고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현재까지 가장 확실하게 인정받은 사례는 희귀 소아 간질 치료제 Epidiolex®입니다.
그 외의 다양한 효능은 아직도 활발한 임상 연구가 진행 중이며, 충분한 과학적 근거를
쌓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즉, CBD는 가능성이 큰 물질이지만, 아직 모든 질병의 치료제로 입증된 것은 아닙니다.
헴프는 CBD만 만드는 식물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헴프를 CBD와만 연결합니다.
하지만 사실 헴프의 가치는 훨씬 더 큽니다.
줄기는 자동차 부품이 되고,
섬유는 친환경 의류가 되며,
씨앗은 슈퍼푸드가 되고,
건축에서는 탄소를 저장하는 헴프크리트(Hempcrete)가 됩니다.
최근에는 바이오플라스틱과 지속가능한 항공연료 원료로까지 연구가 확대되고 있습니다.
한 식물이 이렇게 다양한 산업을 동시에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헴프는
'21세기의 만능 작물'이라는 별명까지 얻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같은 길을 걸을까?
한국은 아직 미국보다 규제가 엄격합니다.
그러나 의료용 CBD 연구와 헴프 산업 특구 사업이 조금씩 확대되면서 변화의
조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계가 친환경 산업으로 전환하는 지금, 헴프는 단순한 대마가 아니라 농업, 바이오, 의약,
건축, 소재 산업을 연결하는 새로운 플랫폼 작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100년 전 미국이 버렸던 식물.
그리고 100년 후 다시 선택한 식물.
헴프는 지금도 조용히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Agriculture Improvement Act of 2018 (2018 Farm Bill)
U.S. Department of Agriculture (USDA)
U.S. Food and Drug Administration (FDA)
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CRS)
National Institute on Drug Abuse (N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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